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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inquiers and Ecrehos 사건(France v. UK, 1953. 11. 17. 판결) 본문

8. Minquiers and Ecrehos 사건(France v. UK, 1953. 11. 17. 판결)

국제분쟁 판례해설/국제사법재판소(ICJ) 판례 2019. 10. 1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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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건 개요 및 배경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해협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암초군 Minquiers 와 Ecrehos 의 영유권이 양국 중 어느 국가에 있는지가 쟁점이 된 영토 분쟁이다.

 

Guernsey, Chausey 등 일련의 거주 가능한 섬이 있다(Channel Islands).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암초군이 중세부터 자국 영토였으며 영유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1066 년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을 침공할 때 문제의 암초군을 포함하여 Channel Islands 가 영국령이 되었고 노르망디는 1204 년 프랑스의 Philip Ausustus 왕이 무력으로 회복하였으나 Channel Islands 는 여전히 영국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는 1204 년 노르망디 회복시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Chausey 섬까지 프랑스가 회복하였으며 이들 암초군은 Chausey 섬과 함께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고 반박하였다. 1950 년 12 월 29 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 문제를 ICJ 에 회부하기로 합의하는 특별 약정을 체결하였고 영국은 이를 근거로 1951 년 12 월 5 일 ICJ 에 재판을 신청하였다. 재판부에 의뢰된 심판 요청은 이들 두 암초군의 영유권이 프랑스, 영국 중 어느 나라에 있는지 결정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나. 주요 쟁점 및 판결

 

1) 역사적 연원

 

    영국은 1066 년 노르망디공의 영국 침략 이후 이들 암초군이 영국령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4 건의 중세 조약 29 과 문건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영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프랑스의 봉건 영주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는 봉토의 범위에 관한 것 등이었으나 재판부는 그 내용이 불분명하고 암초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근거로 영유권에 소재에 관한 의미있는 판단을 도출하기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영국은 Channel Islands 의 주요 구성 도서와 그에 부속된 기타 도서가 함께 언급된 다수의 중세 문건도 영유권의 근거 자료로 제출하였다. 영국 John 왕이 Piers des Preaux 라는 영국 남작에게 Jersey, Guernsey, Alderney 섬을 봉토로 하사한다는 1200 년 1 월 14 일자 칙령과 3 년 후 Piers des Preaux 남작이 Ecrehos 암초군을 Val-Richer 수도원에 봉헌한다는 서한에 이 암초군이 영국 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명기되었다는 것 등이었다. Jersey, Guernsey 섬과 그에 부속된 기타 도서 관리 책임을 특정 관리에게 부여한다는 1258 년과 1360 년의 국왕 칙령도 있었다.  

 

재판부는 이들 문건과 1066 년부터 1204 년까지의 기간 중 Channel Islands 를 포함한 전체 노르망디 지역이 영국 지배 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 이들 암초군이 영국령이라고 강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인정하였다. 암초군의 지명이 특정하여 적시되지 않은 것은 그 중요성이 미미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위와 같은 점만으로는 암초군 영유권에 대한 확정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없으며 영유권 문제는 궁극적으로 소유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증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확인하였다(판결문 55 page). 프랑스의 영유권에 대한 주장은 영국 왕은 동시에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프랑스의 봉건 영주이며 Channel Islands 를 포함한 노르망디 지역은 프랑스 왕의 봉토라는 점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프랑스는 1202 년 4 월 28 일 프랑스 법원이 노르망디 공(동시에 영국 왕)의 봉토 전체를 몰수한다는 판결을 제시하였으나 영국은 영국 왕에 대한 노르망디공이라는 봉건 직위는 명목적인 것이었을 뿐이며 1202 년 판결이 실제 집행되지도 못했다고 반박하였다.

 

재판부는 다툼이 있는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재판부의 역할도 아니고 설사 노르망디(및 Channel Islands)가 원래 프랑스의 봉토였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사실은 1204 년 이후 역사적 변천을 거치는 동안 의미가 없어졌으며 법적으로 유효한 또 다른 소유권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현 시점에서 아무런 법적인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1202 년 판결이 실제 집행되지도 못했지만 설사 판결 당시 특정한 법적인 효력 발생을 의도하였다고 인정한다 하여도 7 세기나 지난 현 시점에서 판결의 법적 효력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어느 견지에서 보아도 합리적인 법의 적용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시하였다.

 

재판부는 영국이 두 암초군에 대한 영유권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이들 암초군은 1204 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수복 이후 계속 프랑스 영토로 보아야 한다는 프랑스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1204 년 이후 프랑스와 영국간의 수많은 전쟁과 강화를 통해 Channel Islands 의 영유권이 변천되었으므로 1204년 노르망디 수복에 대해 프랑스가 주장하는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확인하였다. 재판부는 (영유권 판단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세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도출된 간접적인 추론이 아니라 암초군의 소유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증거라고 단언하고 이에 해당하는 최근의 협정 등을 살펴보았다(57 page).

 

 

2) 1839년 어업협정

 

    영국과 프랑스는 1839 년 8 월 2 일 어업 협정을 체결하여 Channel Island 인근에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였다. 프랑스는 Minquiers 와 Ecrehos 가 이 구역 내에 소재하나 영유권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1839 년 8 월 2 일 이후 각국이 이 암초군에서 행한 행위는 영유권의 증거로 상대국에 대해 제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프랑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우선 1839 년 공동어로구역은 어로 활동에 관한 것이지 (공동어로구역 내 섬과 같은) 육지 사용과는 무관하며 당사국이 어업 협정 체결 이후의 활동을 토대로 이 사건 암초군에 대한 영유권을 표출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해당 암초군의 영유권 소재가 명백한 경우에도 당사국은 이들을 포함한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할 재량이 있으며 공동어로구역에도 불구하고 당사국은 영유권을 표출하는 1839년 어업 협정 체결 후 행위를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프랑스의 주장대로 1839 년 이후 행위를 배제해야 한다면 Ecrehos에 대해서는 1886 년에, Minquiers 에 대해서는 1888 년에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프랑스 자신의 행위도 배제해야 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3) 결정적 기일

 

    이 사건 암초군의 영유권 분쟁의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 30에 관해 영국은 양국이 ICJ 재판 회부에 합의한 특별 약정 체결일인 1950 년 12 월 29 일이라고 보았다. 해당 암초군의 영유권에 대해 양국이 오랜 세월 동안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구체적인 분쟁으로서 확립(crystallized)된 것은 그 날짜라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1839 년 8 월 2 일 어업 협정 체결일이 결정적 기일이며 이 날짜 이후의 행위는 영유권 보유의 근거로서 활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어업 협정 체결일에 해당 암초군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 발생하지는 않았으며 양 당사국이 문제된 해역에서 배타적인 어로권에 대해 다투어 오기는 했으나 (어업 협정에서) 이 문제를 암초군의 영유권 문제와 결부시키지 않았다고 확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부는 어업 협정 체결이 영유권과 관련된 증거를 수락 또는 배척하는 효과를 가져야 할 이유는 없으며 프랑스가 1886 년과 1888 년 암초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영유권에 관한 (법적인 의미의)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1886 년 또는 1888 년을 결정적 기일이라고 결정하지도 않았다.

 

재판부는 이들 암초와 관련된 양 당사국의 행위가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발생하여 왔으며 그 후에도 중단없이 유사한 방식으로 계속되어 온 상황에서 1886 년과 1888 년 이후 발생한 모든 사건을 배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영국은 1867 년 체결된 영국-프랑스간의 또 다른 어업 협정 37 조에 영국 도서 또는 영국은 Jersey, Guernsey, Alderney 등과 그 부속 도서를 포함한다고 정의되어 있으며 1859 년 영국-프랑스 잠수함 송신 협정, 1843 년 영국 해양 어로법에도 유사한 규정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재판부는 부속 도서라는 표현에 Minquiers 와 Ecrehos 가 포함된다고 양국이 의도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영국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57-60 page).

 

4) Ecrehos 영유권 심리

 

   영유권 판단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간접적인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증거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재판부는 영국이 제출한 Ecrehos 에 대한 영유권 보유 증거와 프랑스의 반론을 심리하였다. 영국은 1203 년 Piers des Preaux 남작이 Ecrehos 를 Val￾Richer 수도원에 봉헌(frankalmoin 31 )할 때 그 섬이 1200 년 영국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봉토라고 적시했다는 점을 들었다. 프랑스는 봉헌하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Ecrehos 는 Preaux 남작이 영국 왕으로부터 봉토로 하사받은 Channel Islands 의 일부분이 아니며 Ecrehos 를 봉헌받은 수도원은 1204 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수복과 함께 프랑스령이 되었다고 반박하였다. 재판부는 영국이 제출한 중세 문서에 근거하여 봉헌이란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점유(tenure)의 개념으로서 명목상 Preaux 남작의 봉토 지위는 유지하나 그 사용권 및 그로부터 유래하는 수익을 수도원이 행사, 독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영국은 Preaux 남작의 봉토인 Channel Islands 가 1203 년 몰수되어 영국 왕이 지명하는 관리가 관할하였고 당시 Ecrehos 에 작은 수도원이 있어서 수도사가 Jersey  섬에서 시행된 재판과 관련하여 세 차례 소환되었던 기록과 밀을 세금으로 납부하였던 기록을 제출하였다. 재판부는 당시 Jersey 섬과 Ecrehos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암초 위 작은 수도원에 밀을 납세케 하자 수도원이 폐쇄되었으며 Jersey 섬과의 밀접했던 관계도 중단되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19 세기 들어 Jersey 섬과 Ecrehos 간에 밀접한 관계가 주로 굴 채취를 이유로 다시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영국(Jersey 섬 당국)이 Ecrehos 에 행정, 입법권을 행사한 근거로 제출한 자료에 대해 증거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재판부는 아래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볼 때 Ecrehos 에 대하여 영국(Jersey 섬 당국)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지방 행정 관할권을 통상적으로 행사해온 점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 Jersey섬의 영국 왕립 재판부가 Ecrehos에서 범죄를 저지른 Jersey섬 주민을 재판한 다수 사례 (1826, 1881, 1883, 1891, 1913, 1921)

  • Jersey 치안 당국이 Ecrehos 에서 발견된 변사체를 검시한 사례(1859, 1917, 1948)

  • 1820 년경부터 Jersey 주민이 Ecrehos 에 주택 건설 및 거주한 사실

  • Ecrehos 거주민이 Jersey 성당의 신도 명부에 기재되고 세금을 납부한 사실

  • Ecrehos 거주민 소유 어선이 Jersey 항의 선적 기록부에 1872 년 등재되고 이 어선에 대한 어업 면허가 1882 년 취소된 사실

  • Ecrehos 에서 행해진 부동산 거래 계약서가 소유권 증명을 위해 Jersey 섬 등기부에 등기된 다수 사례(1863, 1881, 1884)

  • 1884 년 Jersey 세관 분소가 Ecrehos 에 설치되고 Jersey 세관 당국의 조사(census)  범위에 Ecrehos 가 명기되고 조사를 위해 세관원이 1901 년 방문한 사실

  • Jersey 당국 관헌이 1885 년 이후 주기적으로 Ecrehos 를 방문했고 선박 인입 

프랑스는 Jersey 섬 당국이 1646 년에 Jersey 주민의 Ecrehos 근해에서의 무허가 조업을 금지하였다고 밝히고 이는 Ecrehos 를 영국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는 근거라고 주장하였으나 재판부는 프랑스의 주장이 조업 금지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기각하였다. 재판부는 영국이 Ecrehos 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한 경우에 프랑스가 항의한 사례가 있으나 자신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1886 년 12 월 15 일 영국 외무성 앞 공한을 통해 비로소 영유권을 주장하였다고 확인하였다. 재판부는 위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Ecrehos 는 13 세기부터 영국 왕이 하사한 Channel Island 봉토의 일부로 취급되어 왔고 14 세기 초 이후부터는 계속 영국 왕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영국 왕이 행정권을 행사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영국 당국이 19 세기 대부분과 20 세기에 걸쳐 Ecrehos 에 국가 권능을 행사하였으나 프랑스는 소유권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Ecrehos 의 영유권은 영국에 있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67 page).

 

5) Minquiers 영유권 심리

 

      영국은 Jersey 섬 소재 Noirmont 領地 법원이 Minquiers 해역에서의 난파선과 화물 처리 방안에 대해 판결한 사실 및 판결문에 난파 해역이 ‘봉토 안’이라고 적시한 사실(1615 년, 1616 년, 1617 년)을 Minquiers 에 대한 영유권 입증 자료 중의 하나로 제출하였다. 재판부는 Minquiers 가 Noirmont 의 영지가 아니라면 법원의 판결을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인정하였다. 영국은 1692 년 Jersey 섬의 왕립 재판소가 1620년 추밀원 서한 및 1632 년 법령을 근거로 Minquiers 해역에서 난파된 선박의 화물을 영국 국왕과 Jersey 영주, 구조선 소유주가 3 등분하여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한 것도 영유권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재판부는 추밀원 서한 및 1632 년 법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영국도 알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위 판결만으로는 영국 영유권을 뒷받침할만한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고 기각하였다. 영국은 1779 년 Jersey 항만 당국이 Minquiers 해역에서의 해난 구조 활동에 참가한 선박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결정도 영유권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재판부는 Jersey 당국이 Minquiers 가 Jersey 섬의 일부로 인식했기 때문에서만 보조금을 지급한 것은 아니라고 기각하였다. 영국은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증거를 제출하였다.

 

  • Jersey 사법 당국이 Minquiers 에서 발견된 시체를 검시한 기록(1850, 1938, 1948)

  • 1815 년경 이후 Jersey 주민이 주택을 건설하고 상주한 사실 및 이들 주민이 Jersey 교구에 신자 등록이 되어 있고 재산세를 납부한 사실

  • Ecrehos 거주민이 Jersey 성당의 신도 명부에 기재되고 세금을 납부한 사실

  • Ecrehos 거주민 소유 어선이 Jersey 항의 선적 기록부에 1872 년 등재되고 이어선에 대한 어업 면허가 1882 년 취소된 사실

  • Ecrehos 에서 행해진 부동산 거래 계약서가 소유권 증명을 위해 Jersey 섬 등기부에 등기된 다수 사례(1863, 1881, 1884)

  • 1884 년 Jersey 세관 분소가 Ecrehos 에 설치되고 Jersey 세관 당국의 조사(census) 범위에 Ecrehos 가 명기되고 조사를 위해 세관원이 1901 년 방문한 사실

  • Jersey 당국 관헌이 1885 년 이후 주기적으로 Ecrehos 를 방문했고 선박 인입 경사도로, 신호등, 부표 등을 건설한 사실

프랑스는 Jersey 섬 당국이 1646 년에 Jersey 주민의 Ecrehos 근해에서의 무허가 조업을 금지하였다고 밝히고 이는 Ecrehos 를 영국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는 근거라고 주장하였으나 재판부는 프랑스의 주장이 조업 금지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기각하였다. 재판부는 영국이 Ecrehos 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한 경우에 프랑스가 항의한 사례가 있으나 자신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1886 년 12 월 15 일 영국 외무성 앞 공한을 통해 비로소 영유권을 주장하였다고 확인하였다. 재판부는 위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Ecrehos 는 13 세기부터 영국 왕이 하사한 Channel Island 봉토의 일부로 취급되어 왔고 14 세기 초 이후부터는 계속 영국 왕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영국 왕이 행정권을 행사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영국 당국이 19 세기 대부분과 20 세기에 걸쳐 Ecrehos 에 국가 권능을 행사하였으나 프랑스는 소유권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Ecrehos 의 영유권은 영국에 있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67 page).

 

 

 

(작성자 : 김승호 신통상질서전략실장)


1) Treaty of Lambeth(1217), Treaty of Paris(1259), Treaty of Calais(1360), Treaty of Troyes(1420)

2) 국제재판에서 당사자의 행위가 소송의 쟁점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일자, 또는 분쟁의 실체적 사실이 발생했다고 말해지는 기간의 終点

3) 권력자가 종교 기관에 땅을 기부하는 중세 유럽 시기 노르만족의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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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산업통상자원부 김승호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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